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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ho ​Choi

銀絲 - 은사 (The Filament)

Chapter 1. 문턱아래 ​

남자는 문턱 아래가 가장 조용하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문턱 위의 시간은 언제나 조금씩 흔들리고, 빛도 소리도 명확했지만
그 명확함 안에는 늘 어떤 불협이 어딘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문턱 아래는 달랐다.
그곳에서는 모든 감각이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묻지 않았다.

남자가 잠들기 직전, 현실의 표면은 언젠가부터 얇게 갈라지곤 했다.
가로등 아래에서 반짝이는 먼지처럼,
그 먼지 사이로 아주 낮은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 공기에서 남자는 문턱 아래로 내려가는 기척을 처음 느꼈다.
그때는 은사(銀絲)가 나타나기 한참 전이었다.

남자는 그 공간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형용할 수 없었다.
방 안이 조용해질 때 그곳은
바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흐트러져 있었고,
눈을 감으면 어딘가 목 뒤보다 깊은 자리에서 가늘게 울렸다.

문턱 아래에서는 감각들이 순서대로 꺼졌다.


먼저 청각이 낮아지고,
그 다음은 시야의 가장자리였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 둘이 사라지는 순간 남자는
자신이 이미 문턱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날은 문턱 아래의 서늘한 바람이
남자를 지하로 내려 보내는 전조처럼 느껴졌다.
계단이 나타나기 전의 정적,
아직 층의 번호조차 정해지기 전의 무게.
남자는 그 질감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남자가 처음 문턱 아래를 만난 것은
아버지와 다투던 밤이었다.
분노도, 울음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감정이
방 안에 남아 있을 때
바닥이 미세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그 아래로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다.
꿈도 현실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층.

그날 남자는 내려가지 않았다.
그저 문턱 아래의 공기만을 느끼며
몸을 다시 현실로 끌어올렸다.
그때부터였다.
문턱 아래는 남자에게
지하세계보다 더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며 문턱 아래의 고요는
남자의 감각 중 가장 오래된 형태가 되었다.
누군가와 말을 나눌 때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듣는 동안에도
남자는 종종 문턱 아래의 낮은 숨결을 떠올렸다.
거기는 내려가는 곳이 아니라 멈춰 있는 곳이었다.
어떤 층도 아니고, 어떤 방향도 아니었다.

그날 밤, 남자는 침대에 누워
귀마개를 끼지 않고 눈을 감았다.
문턱 아래가 자신을 부르지는 않았지만
문턱 아래의 조용함만은
목 뒤에서 아주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내려가기 전의 세계였고,
남자는 오래전부터 그 세계와 함께 살아왔다.
문턱 아래는 항상 거기에 있었다.
남자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Chapter 2. 계단

남자는 그날 따라 잠들기 전의 공기가 유난히 가벼웠다고 기억했다.
문턱 아래의 숨결이 평소보다 한 음 더 낮게 흔들렸고,
그 울림은 발밑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
계단의 첫 단이 아무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계단은 실체가 있으면서도, 오래된 꿈의 잔상처럼 형태가 일정하지 않았다.
발을 디디면 단단한 감촉이 있었지만
시야에 비치는 폭은 단 한 번도 같아진 적이 없었다.

남자는 그것이 ‘계단’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왜 계단인지, 왜 아래로만 이어지는지—
그 이유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그대로 첫 단에 발을 놓았다.
발끝이 가볍게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천천히 흔들렸다.
가벼운 잔향 같은 떨림.
마치 방 전체가 그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자는 천천히 내려갔다.
몇 개의 단을 밟은 뒤 잠시 멈추었다.
그 아래에서 무언가 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 3층.

그곳은 그가 예상한 어둠과는 완전히 달랐다.
공기는 얇았고, 어딘가에서 희미한 빛이 흘렀다.
빛은 색을 가지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온기를 품고 있었고,
그 온기는 자신을 압박하지도, 풀어놓지도 않았다.

남자는 그곳을 “놀이공원 같은 층”이라고 일기에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실은 그 말로도 정확히 표현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움직이는 것도, 소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여름밤처럼
어딘가에서 어른거리는 기척이 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무엇을 본 것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느낌만 남아 있었다.
가벼움.
짐을 잠시 내려놓았을 때의 그 비어 있는 감각.

그는 그 감각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몸이 더 아래로 기울어졌고,
아래쪽에서 더 깊은 층의 기척이 느껴졌다.

남자는 그 기척을 따라 내려가려 했으나
은사가 조용히 목 뒤에서 떨렸다.
은사는 지하 3층 이상으로는
오늘은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했다.

남자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올라오는 동안 공기의 밀도는 조금씩 무거워졌고,
현실의 빛은 조심스레 되돌아왔다.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꿈을 꾸었는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첫 계단을 디뎠던 순간만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잠으로 향하는 길은 늘 계단의 첫 단에서 시작되었다.
아래로 이어지는 길은
그가 잘 아는 듯 전혀 모르는 세계였다.

그리고 남자는—
그 세계를 다시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조용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Chapter 3. 잔향 

남자는 그날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무언가가 조금 어긋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이상함이 아니었다.
얼굴에 닿는 공기의 압력, 발바닥 아래의 온도,
침구가 흘러내리는 속도—
그 모든 것이 미묘하게 ‘반 박자 느린 현실’처럼 움직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초침이 그가 눈으로 따라가기 전,
먼저 한 칸 옮겨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피로라고 생각했다.
전날 밤 계단 아래의 공기를 오래 들이마신 탓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이 감각은 단순한 피로와는 다른 에서 온 것이었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눌렀을 때
버튼의 불이 그의 손가락이 표면에 닿기도 전에 먼저 켜졌다.

순간 남자는 혀끝에 금속 맛이 스쳤다.
낯선 맛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이미 알고 있던 맛.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무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에 공기가 먼저 흔들린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의 몸이 아니라 현실이 조금 늦게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동료와 인사를 나누던 중
남자는 상대의 목소리가 입 모양보다 아주 느리게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한 단어의 끝이 다음 단어의 시작과 어긋나며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는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귀가 아니라 현실의 소리 자체가
지하층의 잔향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동료는 아무 이상을 느끼지 못한 듯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피곤해 보여요. 괜찮아요?”

남자는 순간 웃는 타이밍을 놓쳤다.
자신의 표정이 얼굴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능숙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의 온기가 얼굴 안쪽으로 스며드는 데는
평소보다 두 박자 정도 더 걸렸다.

점심 시간, 창가에 앉아 있던 그는
컵에 담긴 물을 보다가 움직임이 멈췄다.
물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진동의 방향은 위나 아래가 아니라—
어디에도 없는 방향.
현실에서 설명되지 않는 결이었다.

그 결은 목 뒤의 은사와 닮아 있었다.
실의 미세한 떨림과 비슷한 파동.
그 진동이 컵의 표면까지 번져 온 듯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컵을 잡아 가만히 지켜보았다.
흔들림은 그가 촉감을 느끼기 전, 먼저 사라졌다.

그 순간 남자는 확신했다.
지하층의 감각이 현실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회의 때, 남자는 동료가 넘겨주는 서류를 받다가 눈을 의심했다.
종이가 자신의 손에 닿기 전에
먼저 가벼운 감촉을 남겼다.

마치 손끝이 아니라, 손끝 아래층이 먼저 서류를 받아낸 것처럼.

남자는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아래에 또 다른 손이 있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층.

그리고 그 손이
자신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조용히 인정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녁의 공기는 유난히 무거웠다.
아니, 남자의 몸이 가벼운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디론가 가라앉는 대신
어디론가 떠오르는 느낌.
몸이 현실의 바닥에 닿지 않는 기분.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방은 텅 비어 있었지만
누군가 방금 그곳을 지나간 듯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커피향도, 비누향도 아닌—
층의 냄새 같은 것.

그는 그 냄새가 사라지기도 전에
목 뒤의 가벼운 떨림을 느꼈다.

은사는 오늘 내려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올라오지도 않은 듯한
이상한 기척을 남기고 있었다.

남자는 그 기척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남자는 그저 잔향을 조용히 견디고 있었다.

Chapter 4. 지하 5층 

남자는 그 층에 처음 닿은 순간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지하 3층의 얇은 밝음과 지하 4층의 흐릿한 무게를 지나
그가 한 단 더 내려갔을 때—
공기의 온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피부의 결이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저 풀리는 듯한 느낌

.

남자는 그 순간,
“여기는 다른 층이다”라는 사실을 말하기도 전에 알고 있었다.

지하 5층은 형체가 없었다.
방도, 길도, 소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분명한 윤곽이 있었다.

그 윤곽은 무언가가 없다는 방식으로만 존재했다.

남자는 그 결을 평소에 겪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맞았다.
마치 오래된 피로가 조용히 등 뒤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그 층에서는 자기 자신조차 무겁지 않았다.

숨을 쉬면 숨이 가슴에 닿기도 전에 먼저 가라앉았다.
몸의 어느 부분도 자기 무게를 주장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 편안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만큼은 그조차 중요한 정보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다.
‘앉아 있었다’는 표현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땅이 없는 층에서 앉는다는 개념은 애초에 불확실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몸은 어떤 표면에도 기대지 않은 채
완전히 가벼워져 있었다.

그 층에서는 기억이 흐려졌다.
지우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는 방식으로 흐려졌다.

남자는 그 순간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떠올렸다.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겠다.”

그 문장이 남자를 놀래키지도, 어지럽히지도 않았다.
지하 5층은 자기 자신을 허락하는 층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절대로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은사도, 계단도 아닌—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그의 몸 속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눌려 있던
어떤 고요 같은 것.
그 고요가 이 층에서는 눈을 뜬 것처럼 깨어 있었다.

남자는 얼마나 오래 그 층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의 결이 그 층에서는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상체 한쪽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하 5층에 오래 머물면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위치가 모호해진다는 것.

그제야 그는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계단의 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지하 5층에서는 ‘올라간다’는 개념이 항상
조금 늦게 따라온다는 것을.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섰다는 감각이 몸보다 먼저 움직였다.
이 층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편안함은 지하 6층으로 이어지는
가장 위험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계단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도 전에
목 뒤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은사는 말 없이 그를 위로 이끌었다.

남자는 계단을 한 계단씩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현실의 밀도가 조금씩 돌아왔다.

지상으로 가까워질수록
그는 자신이 5층의 공기를
몸 어딘가에 남겨 가지고 올라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 공기는 잠에서 깨어난 뒤 몇 시간 동안
남자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가볍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 가벼움은 축복이 아니었다.
그곳에 다시 내려가고 싶어지는
아주 조용한 유혹이었다.

남자는 현실의 문턱 위에 서서
한 번 더 아래를 바라보았다.

지하 5층은 그의 몸 안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두고 온 가장 조용한 층이었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층이기도 했다.

Chapter 5. 은사의 방향 

은사는 남자가 처음 목 뒤에서 그 떨림을 느끼기 훨씬 전부터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는 실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었고, 밤마다 스스로 불러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사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방향은 남자가 내려가고 싶은 층도, 머물고 싶은 층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된 기척, 감각의 아래층에서 이어진 움직임이었다.
 

어느 밤, 남자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지하로 내려갈 생각도 없었고 실을 만질 계획도 없었다.
오히려 오늘만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천천히 누웠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은 조용했고 커피향도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나 눈을 감자마자 실이 움직였다.
 

남자가 손을 댄 적도 없고 목 뒤로 가져간 적도 없는데,
은사는 이미 그 자리에서 아주 느리게 깊어지고 있었다.
 

그 떨림은 그가 아는 떨림과 달랐다.
기척이 아니라 방향에 가까웠다.
어떤 의도가 천천히 모양을 갖추는 느낌.
 

남자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내려가고 싶지 않아.”
그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으나 은사는 그 문장을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반응하지 않는 듯했다.
 

실의 방향은 남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였다.
 

계단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빛이 없는 곳에서 그림자는 먼저 생겼다.
남자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발밑에서 공기가 기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은사는 그를 끌어당기지 않았다.
끌어당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어디가 아래인지 알려주는 듯했다.
 

남자는 사람들이 방향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감각이 먼저 방향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발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새끼발가락 끝이 미세하게 아래쪽을 가리켰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은사는 조용히 반응했다.
마치 “맞아. 그쪽이야.” 하고 알려주는 듯한 미세한 떨림.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실이 흔들린 방향대로 몸이 자연스럽게 기울어졌을 뿐이었다.
 

지하 4층을 지나자 은사는 조금 더 길어졌다.
길어진다는 표현이 정확한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떨림이 남자의 척추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하 5층보다 더 아래의 공기.
그곳에는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어떤 층이 기척으로만 존재했다.
 

그 층은 남자가 내려가고 싶어하는 층이 아니었다.
그 층은 은사가 가고 싶어하는 방향이었다.
 

그 둘은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었다.
그 밤은 ‘다른 쪽’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그 방향을 따라가다가
다시는 위로 올라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 역시 은사의 떨림 속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떨림은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욕망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 방향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계단의 단을 밟으며
자신의 발로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가는 곳은 이미 실이 가리킨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순간 알아챘다.
 

은사는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있었다.
 

실의 떨림은 남자의 감각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하나의 기울어지는 방향이었다.
 

그 방향은 설명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시키지 못하는,
그의 평생의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 숙제를 지금도 풀지 못한 채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서 있었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그것은 은사만 알고 있었다.
 

남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 나는 이걸 견딜 수 있어.”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실을 간신히 따라가는 속삭임이기도 했다.
 

은사의 떨림이 그 말에 아주 약하게 반응했다.
흔들렸으나 더 깊이는 이끌지 않았다.
 

그 순간 남자는 알았다.
은사는 그에게 방향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감각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방향을
그저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방향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다시 계단을 올라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은사는 여전히 그의 안에서
조용히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Chapter 6. 파묻힘 

남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스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눈동자 어딘가 남자의 뒤쪽 어둠을
미세하게 더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남자가 은사를 감추려 하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겹쳤다.
 

남자는 처음엔 문제의 원인을 일상에서 찾으려 했다.
옷차림 때문일지도, 목선이 드러나는 습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만지던 목 뒤를 일부러 건드리지 않으려 했고,
옷깃을 높게 세워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은사는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히 숨어 있던 실이
남자의 움직임 하나에 결을 잃고 밖으로 번져 나오는 것처럼.
 

남자는 어느 날 휴게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문득 누군가가 말했다.
“목 뒤에… 혹시 뭐가 묻었어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남자의 손끝에 강한 기척이 지나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아, 그냥 빛 때문에 그래요.”라고 말했지만
그 순간 그는 느꼈다.
 

은사가 목 뒤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지나 등으로 천천히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저 ‘뭔가 묻은 것’ 정도로 보았겠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얼룩이 아니라
단단히 자리 잡은 결이었다.
 

그날 밤 남자는 처음으로
은사를 완전히 지우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방의 불을 전부 켜고 거울 앞에 섰다.
목 뒤를 만지면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미세한 떨림이 손가락 끝을 통과했다.
마치 실이 피부와 손 사이를 아주 얇게 가르고 있는 듯한 감각.
 

그는 로션을 바르듯 손으로 목 뒤를 눌렀다.
닦아내려고 했고 지워내려고도 했다.
그러나 손바닥 아래에서 실은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방향을 잡았다.
 

남자는 그때 알았다.
은사는 지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감추려면 감출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들처럼.
 

며칠 뒤 남자는 사람들과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대화를 거의 듣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입 모양보다 조금 늦었고,
빛은 현실보다 약간 기울어져 보였다.
 

남자의 몸은 마치 아래쪽으로 아주 얇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앉아 있었지만 몸 전체가 어딘가로
파묻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감각은 지하 7층 앞까지 내려갔을 때 느꼈던 그것과 닮았지만
이건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 아래라기보다는 안쪽이었다.
남자 안으로 은사가 확장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그날만큼은 안대도 귀마개도 쓰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숨을 들이쉬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은사가 움직였다.
실은 한 올이 아니었다.
여러 올로 갈라진 미세한 결이
남자의 목, 어깨, 등, 팔, 그리고 가슴 안쪽까지
조용히 스며들었다.
 

남자는 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몸의 경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렵다는 생각보다
“드디어 왔구나”라는 생각이 조금 먼저 떠올랐다.
 

실은 그를 덮었다.
덮는 방식도 잠식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감각이
모양을 갖추는 방식이었다.
 

남자는 그 속에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몸이 사라지고
기억이 희미해지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파묻힘은 자기 자신을 잃는 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시 찾는 순간이라는 것을.
 

얼마 후 실은 스스로 자리를 잡았다.
 

남자는 그걸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는 목 뒤를 가볍게 만졌다.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떨림은 그를 끌어내리지도
구원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 함께 있었다.
남자는 숨을 들이쉬고 그 숨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은사는 그를 파묻은 것이 아니라
그와 합쳐지고 있었다.
 

그는 속삭였다.
“괜찮아. 나는 이걸 견딜 수 있어.”
 

그 말은 실에도, 자기 자신에도,
아무 방향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저 말해야만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실은 아주 미세하게 응답하듯 흔들렸다.

 

Chapter 7. 다시, 밤 

남자는 그날 밤 전날보다 조금 천천히 불을 끄기로 했다.
스위치를 내리는 손끝에서 조용한 기척이 흘렀다.
그 기척은 지하층에서 올라온 것도, 현실에서 흘러내린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밤’ 그 자체의 결이었다.
 

방 안은 어둡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의 그 연한 회색 속에서
모든 물건이 좀 더 순한 형태로 자리했다.
 

남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숨이 목을 지나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안
은사가 오늘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주 먼 곳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만 느껴졌다.
 

그 흔들림은 마치 방 한쪽에서
누군가 가볍게 천을 흔드는 정도의 미약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그 흔들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양말을 벗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가 없는 것이 오히려 기척이 되었다.
 

귀마개를 끼지 않고 안대도 쓰지 않고 침대에 등을 붙였다.
이따금은 자기 자신에게
아무 방어 장치도 주지 않아도 되는 날이 있었다.
 

잠에 들기 전의 공기는 언제나 그렇듯 얇았다.
이 얇음이 그가 오래 사랑해온 감각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남자는 오늘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을 만지지도 않았고 목 뒤로 가져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계단의 그림자가 시야 한쪽 끝에서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가 눈을 감은 적이 없는데도.
남자는 그것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저 그림자가 지나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순간
하루 종일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감각들이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은사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용히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떨었다.
 

그 떨림이 위험도, 구원도 아니라는 사실을
남자는 오래전에 이해했다.
 

은사는 그저 그의 오래된 결 중 하나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방 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은사의 기척은 그가 숨을 들이쉬는 속도에 맞춰 조용히 동행했다.
 

남자는 그 동행이 오늘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내일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아주 얇게 가슴 어딘가에 놓였다.
 

그는 손을 들어 목 뒤를 만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실도 없고 잔향도 없었다.
 

하지만 손을 내리는 순간
방의 어둠 한쪽에서
아주 가늘고 길게 뻗은 무언가가 잠시 흔들렸다.
 

남자는 그 흔들림을
더 이상 놀라거나 덮어두려 하지 않았다.
 

그저 밤이 다시 왔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수락의 시간 속에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밤은 그와 함께 있었다.
 

아래도 위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디쯤에서.

 

 

​Draft for archival purposes.
A revised and expanded version will be prepared for publication.

 

​🔗 The_Filament_English_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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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eho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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