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Taeho ​Choi

다른 얼굴들(Other Faces)

Chapter 1. 첫 번째 얼굴

비는 오래전부터 내리고 있었지만 장례식장의 담백한 벽면은 그 사실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습기만이 약하게 스며들며, 공기 전체를 낮고 음울한 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2호실 앞 복도는 조용했다.
향 냄새가 단단하게 퍼져 있었고, 낡은 스피커에서는 추도사가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생전 고인은…’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목소리와 상관없이 멀리서 들리는 듯 희미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단체 문자.
“○○○ 님의 빈소는 ○○ 장례식장 2호실입니다.”
발신인은 없었다.
 

문자는 병원의 시스템에서 자동 발송된 것이었고,
누가 그녀의 마지막 연락처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그저 저장된 번호들로 일괄적으로 흘러나간 정보였다.
그 문자 하나만이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는 다섯 사람을 이 방으로 데려왔다.
 

영정 사진 속 그녀는 단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따뜻하다고도, 차갑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친절.
그 앞에서 각자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방의 왼편에 적의가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영정을 향했지만, 표정에는 애도와는 거리가 먼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비어 있는 것 같기도, 차분한 것 같기도 했다.
 

야경은 향 냄새를 불편해하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밤에 보던 그녀의 얼굴과 전혀 닿아 있지 않은 냄새였다.
 

소온은 입구 쪽 의자에 조용히 앉아 종이컵을 굴리고 있었다.
 

잔영은 가장 오래 영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한 통의 문자.
갑작스러운 죽음.
서로 다른 얼굴을 기억하는 다섯 사람.
그들은 모두 같은 방에 있었지만
서 있는 자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Chapter 2. 적의(嫉意)

장례식장의 공기는 정오의 빛과 상관없이 흐리고 눅눅했다.
향 냄새가 천천히 피어올라 천장 가까이에 무겁게 머물렀다.
남자는 줄을 따라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손에는 국화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어색하게 느꼈다.
 

앞사람들이 차례로 헌화를 했다.
그 순간 남자의 안쪽에서 뜻하지 않은 감정이 불쑥 튀어올랐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며 웃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지금이 어떤 자리인지 알면서도, 웃음은 제멋대로였다.
 

그가 관 앞으로 나와 꽃을 내려놓자
그녀의 사진이 정면에서 그를 향하고 있었다.
웃음이 다시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누르고 향을 올렸다.
 

그녀가 죽었는데
그는 아무 슬픔도 기쁨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상황이 묘하게 우스웠다.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늦은 오후, 공방 문을 닫으려던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담담하게 말했다.
 

“이 동네 임대료가 또 오른대요. 곧 정리하시는 분들도 생기겠죠.”
 

그녀는 감정 없이 말했다.
며칠 뒤 실제로 임대 갱신이 어려워졌고
고객들은 사라졌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무언가를 어긋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장례식장의 정적 속에서
남자는 다른 이들이 말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그녀와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 사이의 간극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헌화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며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그에게는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얼굴.
타인에게는 눈물을 불러오는 얼굴.
또 누군가에게는 다른 얼굴.
 

그 모든 얼굴이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사실만이
기묘하게 오래 남았다.


 

Chapter 3. 은혜(恩惠)

은혜는 장례식장 입구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문 안쪽의 조명, 낮은 숨소리, 향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녀를 떠올릴 때면 항상 같은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어둠, 피 냄새, 겨울 공기.
 

그는 그날 거의 쓰러져 있었다.
도로를 텅 빈 공간이라 착각했던 순간,
빛과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인도로 올리고
떨어진 가방을 건넸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잠시 멈춘 뒤 그녀는 말했다.
“조심하세요.”
 

이후 은혜는 잠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목격자 정보로 연락처를 남겼고
그때 은혜는 그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서로 다시 연락한 적은 없었다.
그저 병원의 기록이 장례식 안내 명단에 포함되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이 은혜에게는 묘하게 우스웠다.
 

장례식장의 사진 속 그녀는
그날의 무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은혜는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살리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본능적 개입?
 

그에게 그녀는
선한 사람도, 냉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하루의 방향을 바꿔준
잠깐의 개입 같은 존재였다.
 

어쩌면 이곳의 모든 사람은
다른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생각은 은혜의 걸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었다.


 

Chapter 4. 야경(夜景)

야경은 장례식장의 낮은 조명과 무채색 카펫을 훑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그는 가장 뒤쪽 자리에 앉았다.
헌화를 할 생각도 확신도 없었다.
그저 여기 와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움직임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사진은
그가 알고 있는 얼굴과 닮지 않았다.
그는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조명이 낮은 술집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늘 조용했다.
 

그녀는 항상 정확한 순간에 자리를 일어났다.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흐르는 음악과 조금 다른 박자.
 

그 뒷모습이 야경에게는 오래 남았다.
 

그녀는 욕망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에서 잠시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흐트러진 자리와 잔의 물자국만 남았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육체가 아닌 방황의 결이었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으니
그때의 공기가 다시 밀려왔다.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사람’이라는 그녀의 얼굴은
야경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에게 그녀는
밤의 얼굴이었다.
 

헌화의 차례가 와도
그는 사진을 보지 못했다.
사진은 정확했고
그의 기억은 흐릿했다.
 

나는 그녀의 어떤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 그녀였을까.
 

그 질문이 야경의 뒤를 따라왔다.

Chapter 5. 소온(素溫)

소온은 장례식장 앞에서 서성이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종이컵을 건네받아 들었지만, 마실 생각은 없었다.
 

그가 그녀를 기억하는 장면은 단 하나였다.
초봄,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
소온이 떨어뜨린 계산서와 봉투들이 인도에 흩어져 굴러갔다.
 

그녀는 지나가다 멈춰 종이들을 주워 모았다.
별다른 표정 없이, 할 일을 처리하듯 조용히.
 

“혹시 빠진 거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영수증을 건네며
뒷면에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그저 분실물 처리 같은 태도였다.
 

소온은 그 번호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번호를 삭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장례식 안내 메시지는
그녀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로 모두 발송되었을 테니까.
 

장례식장 안쪽에서 향 냄새가 일정하게 퍼지고 있었다.
소온은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얼굴은 그날의 무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꽃을 내려놓고 자리를 물러났다.
받은 호의라 부를 만한 장면은 아니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의도나 온기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은 소온에게 오래 남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장례식장을 나서며
소온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영수증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가 건네준 것들 중 하나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영수증을 다시 접어 넣고 그대로 움직였다.
그 행동에도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는 단지
그녀가 남긴 몇 초의 장면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Chapter 6. 잔영(殘影)

잔영은 장례식장 뒤편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동선만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아는 방식은 단순했다.
같은 건물에서 잠시 진행된 독서 모임.
참석자 명단이 자동으로 공유되며
서로의 연락처가 저장된 것뿐이었다.
이름 옆에 적힌 번호는
그보다도 그녀에게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기억하는 장면은 말이 거의 없는 순간들이었다.
창가에 앉아 책을 펼쳐 놓은 채
읽는 듯, 읽지 않는 듯한 자세.
 

그녀는 페이지를 넘길 때도
주변을 의식하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한 무표정이 오히려 특별한 흔적을 남겼다.
 

잔영에게 그녀는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
공간의 밀도를 조금 바꾸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는 그 이상을 알지 못했다.
 

영정 사진 앞에서
그는 한참을 머물렀다.
사진 속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그 미세한 움직임과 정확히 겹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정리된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서로 다른 인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각자 전혀 다른 경험, 다른 온도, 다른 얼굴.
 

잔영은 그 이야기들이
어느 쪽으로도 확정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그녀가 남기고 간 잔상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꽃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을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애도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단지, 어떤 형태가 사라졌다는 사실 정도만 분명했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길에
밖에서는 빗소리가 일정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소리 속에서
그녀의 마지막 얼굴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았다.
곧, 그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잔혹했고,
누군가에게는 따뜻했고,
누군가에게는 날카로웠고,
누군가에게는 흐릿했다.
 

그러나 잔영에게 그녀는
그 모든 것의 경계가 조금씩 번져 있는
미완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그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원래 한 얼굴로 남지 않는다.
 

그녀는 여러 갈래로 나뉜 얼굴들 사이에서
조용한 잔영(殘影)으로 남아 있었다

 

 

Chapter 7. 얼굴들

장례식은 오후 무렵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조문객들은 각자의 속도로 흩어졌다.
한 사람의 삶을 정리하는 자리였지만
정작 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었다.
 

적의는 먼저 건물을 나섰다.
비가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털며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은혜는 우산을 펴고 천천히 걸었다.
그는 횡단보도에 멈춰 서서
한 번 뒤돌아 장례식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이름이 적힌 안내문은
비에 젖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야경은 건물 모퉁이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그저 쥔 채 되돌려 넣었다.
어둠이 올 때쯤 다시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소온은 정문의 화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리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작은 종이 조각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별다른 표정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잔영은 가장 늦게 밖으로 나왔다.
비 냄새가 짙이 내려앉은 공기가
장례식장 안의 향 냄새와 겹쳐 있었다.
그는 그 두 냄새 사이에서
잠시 아무 말 없이 멈춰 섰다.
 

다섯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서로의 기억은 서로의 얼굴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 우연히 모였을 뿐이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 역시
어느 것도 맞았다고 말할 수 없고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적의는 잔혹함을,
은혜는 개입을,
야경은 흐릿한 밤을,
소온은 사소한 행동을,
잔영은 잔상을 기억했다.
 

그 얼굴들이 서로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보였다.
한 사람에게 남는 흔적은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본 각자의 표면일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도로 위에서
모든 그림자는 형태를 잃어갔다.
 

그녀의 얼굴 또한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섯 사람의 기억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며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지속될 것이다.
 

어떤 얼굴이 그녀의 진짜 얼굴이었는지,
그 질문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여러 얼굴들의 한가운데서 사라진 사람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언젠가 다른 형태의 잔영으로 다시 떠오를지 모른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
 

Draft for archival purposes.
A revised and expanded version will be prepared for publication.
EN version forthcoming.

  • Instagram
  • LinkedIn
© Taeho Choi
bottom of page